대한국민항공사(KNA)를 아시나요?
KNA 사장 신용욱. 친일과 신념의 두 얼굴
꼬르마딜리오 2015.09.01 11:11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백여 년에 불과하다. 항공의 역사는 그처럼 단출하지만 발전 속도만큼은 마하 급이어서 기체는 초기의 복엽기, 단엽기 수준을 세차게 뛰어넘어 음속의 몇 배를 넘나들게 되었고, 상업적으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항공 산업 없이는 지구촌이란 단어를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항공시대 초창기는 우리 민족의 암흑기였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 한국인들은 비행기를 이용하여 자국의 선진 기계문명을 과시하는 일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개 넘치던 이 땅의 젊은이들은 창공에서만큼은 일본인을 꺾겠다는 신념을 품고 현해탄을 건너갔다.
그들 가운데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까지 우리나라 민항공사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대한국민항공사 사장 신용욱이다. 하지만 그는 해방 이전 철저한 친일파로서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민항사업을 펼쳤고 태평양전쟁에 부역했으며 조선항공기주식회사를 운영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한 죄과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해산으로 무사방면되었고,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항공사인 KNA(대한국민항공사)를 설립하여 성가를 올렸다. 우리나라에는 안창남이나 최용덕, 김영수, 권기옥 등 세인의 귀감이 될 만한 항공인이 많다. 하지만 신용욱처럼 평생 영욕의 한가운데 부대끼면서 오로지 민항에 모든 것을 걸었던 인물도 드물다.
나도 하늘을 날고 싶다
신용욱은 20세기의 첫 발을 디디는 1901년에 전남 고창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고향에 있는 흥덕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에 올라온 그는 명문 휘문고보에 진학했다. 그런데 1914년 용산연병장에서 벌어진 일본인 비행사 다카소우의 시범비행, 1917년 여의도비행장에서 벌어진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때부터 소년 신용욱은 조인(鳥人)의 꿈을 키웠지만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가로막혔다. 항공초기 비행사고가 빈번한 시기였다. 하지만 초지를 굽히지 않았던 그는 결국 23세 때인 1922년 1월 숙부 신구범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현지에서 그는 휘문고보 1년 선배 안창남이 거쳐 간 오쿠리비행학교에 들어가 이나게 해변에서 비행술을 연마한 끝에 불과 3개월만인 3월 25일에 3등비행사면허를 취득했다. 하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1924년 토우와(東亞)비행전문학교에 들어가 선진 비행술을 익혔다. 이 학교는 1912년 조선의 하늘을 처음으로 비행했던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의 제자 이토 오토지로(伊藤音次郞)가 설립한 민간비행학교였다.
항공시대 초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에 일본에서 비행사 자격증을 취득한 한국인은 장덕창, 이기연, 서웅성, 이상태, 정재섭 등 20여 명이 넘는다. 1927년 12월 9일 신용욱은 서웅성, 김동업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비행가협회를 결성하고 수시로 친목모임을 가지면서 가난한 후배들의 학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박경원이나 이정희처럼 가난한 여류조종사들이 비행사의 꿈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22년 안창남의 모국방문비행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그들에게는 세 가지 소망이 있었다. 첫째 3등비행사 면허를 따는 것, 둘째 자가용 비행기를 구입하는 것, 셋째 2등비행사 면허를 갖고 고향방문비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기연, 이상태, 장덕창 등이 3등비행사 면허를 따고 고향방문비행을 했지만 자가용 비행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무렵 신용욱은 아버지의 지원으로 타이거호라는 이름의 아브로식 제504호 K형 비행기를 갖추고 있었다.
1927년 2월 14일, 신용욱은 애기를 몰고 여의도착륙장에서 모국방문비행을 실시했다. 이튿날인 15일에는 조선일보 최은희 기자, 중외일보 서범석 기자, 동아일보 사진반 한우식 기자 등 3명을 태우고 두 번째로 경성 하늘을 일주했다. 그날 식도원에서 열린 환영만찬회에서 그는 조선 땅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17일에는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를 태우고 3차 비행을 하면서 그해 5월 점촌에서 추락사한 이기연 비행사의 묘지 상공을 선회하며 조의를 표했다.
그해 10월 26일 소망하던 2등비행사면허를 취득한 신용욱은 12월 9일 일본 도쿄를 근거지로 하는 한국인 비행사 14명과 함께 조선비행구락부를 조직했다. 이때 그는 비행구락부장이 되었고, 총무에 서웅성, 도쿄지부장에 김동업이 선임되었다.
조선비행학교를 세우다
1928년 4월 15일, 신용욱은 비행학교 설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고창, 전주, 정읍 등지에서 고향방문비행을 실시했다. 그해 5월 5일 드디어 1등비행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여세를 몰아 12월에 총독부의 비행학교 설립 허가를 받아냈다.
1929년 봄 사비 5천 원을 들여 개교한 조선비행학교는 교관으로 1등비행사 후지타 다케아키, 2등비행사 겸 정비사 김동업을 영입한 다음 미국에서 수입한 신형 비행기를 이용하여 비행사 양성사업을 시작했다. 이 학교의 지원 자격은 고등보통학교 3년 수료의 학력, 수업연한은 1년 6개월, 학비는 훈련비행비를 포함해 800원이었다.
1930년 4월 9일 동아일보에는 조선비행학교 학생 정인달이 비행훈련을 하다가 단독 착륙하던 도중 둔덕에 추락해 비행기가 대파되었지만 교관인 신용욱이 재빨리 그를 끌어내리는 바람에 무사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현재 조선비행학교 출신 비행사로 알려진 사람은 정인달 외에 이한설과 김진영이다. 이한설은 비행학교 졸업 후 중국으로 망명했고, 김진영은 2,3등 비행사면허를 취득한 다음 KNA 민항기 조종사로 활동했다.
당시 신용욱은 총독부 항공관계자들과 인간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1929년부터 확정된 총독부의 항공장려보조금을 받아내 조선비행학교의 운영자금을 충당했다. 이 제도는 시험비행과 항공선전을 포함한 항공로 개척비행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금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재정 유지가 어려웠으므로 1930년부터 나카지마(中島)형 4인승 쌍엽기로 서울상공일주 혹은 인천왕복 등의 유람비행 사업을 벌였다. 그 시절 비행기 탑승객에 대한 보험도 없었고 회사에서 별도의 안전 보장도 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하늘을 날고 싶은 사람은 여의도착륙장에서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죽어도 뒷말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했다.
바쁜 사업의 와중에서도 비행의 열정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1933년 미국에 있는 실라 헬리콥터학교 조종과에 진학하여 동양 최초의 헬리콥터 조종사가 되었다. 이듬해인 1934년 그는 총독부 용역으로 민간항공노선을 확정하기 위해 코스별로 실사 비행하는 전선일주비행(全鮮一周飛行)을 실시했다. 그해 2월 6일에는 일본 체신국과 제국비행협회가 주관한 해군항공대의 2등 항공사 자격을 취득했다. 총 23명의 지원자 가운데 7명이 뽑혔는데 조선인으로서는 그가 유일했다. 이 시험은 비행술과 항공법에 정통한 비행사를 선발하여 항공계의 주역으로 발탁하는 과정이었다.
최초의 언론사 비행사로 활약하다
이런 활약상이 대내외로 널리 알려지면서 신용욱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1934년 7월경 영호남 지역에 수재가 일어나자 조선일보는 취재를 위해 일본에서 대절한 살무손 E2형 비행기의 조종간을 그에게 맡겼다. 당시 일본의 신문사들도 저어하던 비행기 취재를 한국 신문사가 시작했다는 사실은 민족의 커다란 긍지이기도 했다. 신용욱은 그때의 경험을 조선일보에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4회에 걸쳐 ‘삼남(三南) 재지(災地) 조사(調査) 비행기(飛行記)’로 연재하여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로 항공취재 소감을 남겼다. 그 일을 계기로 조선일보는 비행기가 취재와 신문의 신속한 보급에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1년 동안의 교섭을 거쳐 프랑스에서 경비행기 살무손 1대를 구입했다. 그리하여 조선일보는 한국 최초로 취재 및 수송용 비행기를 소유한 신문사가 되었다. 조선일보는 1935년 10월 23일부터 신문 공수를 시작했는데 조종은 역시 신용욱이 맡았다.
본격적인 민항사업을 펼치다
1935년 신용욱은 조선비행학교를 신항공사업사로 개편한 다음 9월부터 조선총독부의 용역으로 평양, 나남, 신경 등지를 거쳐 대륙의 제남, 난징을 순회하는 동아친선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1936년 9월부터는 어업협회의 요청으로 청진, 함흥, 강릉, 울산을 잇는 동해안 일대에 출몰하는 청어, 정어리 떼를 발견해 어업기지와 어선에 통지하는 어군탐견사업으로 수익을 올렸다.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신용욱은 그해 10월 조선항공사업사를 설립하여 민간항공수송사업에 뛰어들었다.
1939년도 [일본항공연감]에 따르면 조선항공사업사는 경성부 청운정 252번지에 있었고 영업소는 여의도비행장, 소유 기체는 가스덴(瓦斯電) KR-2형 여객기(4인승) 3대, 살무손 2A2형 5대, 비치크라프트 C-17E형 1대, 14식 수상기 2대, 슈퍼 유니버설 1대, 아브로식 504K형 1대 등 총 13대였다. 영업종목은 경성-이리-광주 간 정기항공, 에어택시, 선전 및 유람 비행, 어군탐색비행, 총독부 위촉비행 등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일제가 한국인 동원을 개시하자 신용욱은 그해 6월부터 직원들을 하이난다오(海南島)에 징용으로 파견했다. 1942년에는 일본 해군의 중고폭격기를 불하받아 경성-후쿠오카 간의 군대수송을 담당했고 칭다오 등지에 해군연락비행을 도맡았다. 또 일본 해군의 후원으로 조선항공기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항공기 부속 제작 사업을 개시했고 글라이더 제작 사업도 병행했다.
1943년부터 일본의 국책항공사인 대일본항공도 군수송체계로 전환되었고 민간항공이 전면 중단되었다. 또 만주항공, 중화항공이 남방항공수송부로 부분 징용되었다. 이때 조선항공사업사는 진해에 있던 해군 진수부사령부로부터 96식 중형공격기와 DC-3 각각 한 대씩을 대여 받아 일본 해군 용역운항에 뛰어들었다. 당시 신용욱을 비롯한 한국인 조종사들은 일본 해군 군속 신분으로 여의도, 진해, 제주 등을 기지로 하여 슈퍼 유니버설 여객기를 이용해 다롄-마이즈루(舞鶴), 하이난다오 등지에서 인원과 물자를 수송했다. 또 대구에서 다롄까지 폭탄 수송, 서해와 동해에서 모슬포를 기지로 하는 대잠수함 초계비행에 참여하기도 했다.
종전이 임박했던 1945년 5월에서 6월까지 그들은 해군이 제공한 수상기로 다롄-진해를 왕래하며 버마, 베트남 등지에 남아있던 일본군 비행사를 실어 날랐다. 그 와중에 박봉지 비행사, 한택승 비행사, 이상민 비행사, 김상호 기관사, 진대식 통신사가 미군 전투기에 격추당해 목숨을 잃었다.
KNA(대한국민항공사)의 빛과 그림자
1945년 해방과 함께 신용욱은 자신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여타 항공인들과 마찰을 빚으면서도 꿋꿋하게 민항 사업을 밀어붙였다. 1946년 2월 군정청 운수국장 코넬슨 중령을 설득하여 정기항공운송사업 허가를 따는 데 성공한 그는 3월 1일 조선항공사업사를 대한국제항공사로 개칭하고 후원자인 윤치영을 사장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대한국제항공사는 비행기가 한 대도 없는 상황이었고 연합군최고사령부의 비행금지령인 SCAPIN 301호로 인해 민항 사업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의욕적으로 미국 스틴슨(Stinson)사의 인기모델이었던 스테이션왜건(Station Wagon) 3대를 발주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신용욱은 대한국제항공사의 명칭을 대한국민항공사(KNA. Korean National Airlines)로 바꾸고 사장으로 복귀했다. 10월 9일 KNA에서 주문한 스틴슨 비행기 3대가 들어와 교통부로부터 HL-02, 03, 04라는 항공기 등록번호를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10월 30일 오전 10시, 태극마크가 선명한 HL-02 스틴슨기가 승객 3명을 태우고 김포비행장을 이륙 서울-부산 간 첫 취항에 돌입했다. 조종사는 김진영이었다. 1949년 2월 1일, KNA는 서울-강릉, 서울-광주-제주, 서울-옹진 구간에도 취항함으로써 해방 후 처음으로 서울과 각 지방의 주요도시를 잇는 항공망이 열렸다.
그 무렵 신용욱은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등과 함께 반민특위에 구속되어 법정에서 과거의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추궁 받았다. 그의 혐의는 일제 말기 비행기제작사업과 일본 해군 징용 문제, 해남도 근해에서의 DC-3 격추사건 등이었다. 하지만 반민특위의 와해로 인해 2개월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1950년 5월, 신용욱은 자유당의 공천으로 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고창을 선거구에서 한민당 제헌의원 백관수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고난이 시작되었다. 당시 김포비행장에 계류되어 있던 3대의 스틴슨 여객기 중 2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나머지 한 대는 6월 27일 서울 함락 직전 신용욱 사장이 가족들을 태우고 직접 조종해 김해비행장으로 대피함으로써 가까스로 보전했지만, 7월 중순 채병덕 장군을 호송하려던 공군 중위 김양욱에 의해 징발되었다가 착륙 도중 전파되었다. 그 결과 KNA는 항공기 한 대도 없던 초창기 형국으로 전락했다.
9.28 수복과 함께 서울에 돌아온 신용욱은 타이완의 CAT(Civil Air Transport.중국민항공운공사) 소속 DC-3 쌍발여객기 2대를 임차하여 미군 장병들을 수송하면서 KNA재건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그 와중에도 비행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1953년 비행시간 3천 시간을 돌파해 미국 민간항공연맹으로부터 무사고 비행기록 표창을 받은 최초의 동양인이 되었다. 1956년에는 한미항공협정 체결을 성사시켜 미국 보잉사로부터 1백만 달러의 차관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루었고 3대 민의원에도 당선되었다.
승승장구의 시기였다. 그런데 1958년 2월 16일 KNA 소속 여객기 창랑호가 북한 간첩들에 의해 납북되어 큰 재정 손실을 입은 데다 속초에서 여객기가 불시착하는 등 사고가 이어지면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벌어진 4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은 홍순희에게 패배했고, 1960년 5대 총선에서도 낙마함으로써 정치적 기반까지 잃었다.
영욕의 날개를 접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그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1962년 검찰이 부정축재혐의로 그를 기소했던 것이다. DC-4기를 구입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받은 100만 달러 가운데 30만 달러를 횡령하고, 이 비행기가 외국에 취항했을 때 홍콩에 있던 아들과 함께 밀수를 했다가 공항주재 기관원에게 발각되었지만 고위층의 압력으로 수사를 중단시켰으며, 밀수로 번 외화 20만 달러를 미국은행에 예금하여 국내재산을 불법 도피시키고, 시흥에 호화별장을 구입해 월간 6백만 환 이상을 낭비했다는 혐의였다.
1961년 5월부터 출범한 군사정권은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우면서 재차 그를 압박했다. 그해 8월 25일 그는 종로1가 회사 앞에서 택시를 타고 귀가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 26일 여의도비행장 입구에 있는 한강 샛강 둑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입지전적인 인물의 허망한 최후였다.
당시 경향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그 무렵 회사 직원들의 봉급은 3개월 째 체불된 상태였다. 당장 필요한 자금은 15만 달러였지만 수급이 되지 않았고, 매달 적자가 3,4천만 환에 달했으며, 외국에 지불할 비행기 보험료만도 수만 달러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10여 억 환의 부채를 지고 있었는데 KNA의 운영이 악화되면서 채권자들에게 연일 빚 독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는 그의 죽음과 관련해 군사정부와의 불화설, 정치자금 관련설 등 숱한 풍문이 떠돌았다.
1958년 2월 16일 대한국민항공사(KNA)소속 민항기인 DC-13 (창랑호)가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던 중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탑승객으로 위장해 조종실을 접수한 무장괴한 5명은 비행기를 납치해 북한으로 넘어갔다. 당시 비행기에는 기장인 미국인 홉스를 비롯한 승무원 3명, 승객 30명이 탑승했다.
오전 11시 30분 경에 이륙한 창랑호는 경기도 평택군(현 평택시) 상공에서 납치되어 평양에 있는 순안 국제공항에 강제착륙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언론은 “대한국민항공사가 자의적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고 거짓 발표해 큰 충격을 안겨줬다.
한국정부는 22일 국회에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를 행하고, UN군에 참가한 16개국에 대해 협력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UN군은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승객의 송환과 기체의 조속한 반환을 요구했다. 같은 해 3월 6일 26명의 승객을 돌려보냈으나 나머지 승객 5명, 그들의 가족 3명을 포함한 8명과 비행기는 돌려보내지 않았다.
또한 납치범들은 승객으로 있던 사람 중 군사고문단원인 미군 중령 1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경찰당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비행기납치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을 납북의 총책임자 기덕영 조종 하에 공작원 김택선, 김길선, 김순기, 최관호, 김형, 월북동행자 김애희와 김미숙 등 7명의 납치범을 발표하고, 기덕영 등 3명을 사건의 공작과 배후 혐의로 체포했다.
이후 납북된 창랑호의 기체가 반환되지 않아 대한국민항공사는 운행상의 커다란 타격을 입어 적자를 해소하지 못했다.
결국 대한국민항공사 창업주 신용욱 대표는 한강에 투신자살을 하기에 이르렀고 항공사는 61년 11월 13일 폐업처리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남한에서는 반북 반공 궐기대회가 전국에서 끊임없이 개최됐고,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힌 납북 승객의 강연회를 듣기 위해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몰렸으며, 공무 집행 중 몸을 다친 군경들이 북한을 성토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목을 조르고 있는 북괴의 도발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핵무기 개발에 이어 이제는 개성공단 폐쇄, 핵전쟁 등을 운운하고 있다.
북괴의 만행은 6.25남침전쟁 이후 끊이지 않고 지속되어 왔다. 현재 북한의 호전적 전쟁위협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북한 도발의 역사를 잊지 않는 국민들의 하나된 안보의식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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