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複雜單純

금순이의 두 얼굴

marineset 2023. 5. 29. 01:14
굳세어라 금순아

1.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가고 길을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왔다

2.일가친척 없는몸이 지금은 무엇을하나
이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떴다

3.철의 장막 모진 설음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 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 보자 얼싸 안고 춤도 춰보자


[영화로 본 한국사회] 금순이의 두 얼굴

필자/ 안정효

1941년 서울 생
소설가·번역가
서강대 영문과 졸, 코리아 헤럴드·주간여성·코리아 타임즈 기자 역임
서강대·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역임
하얀전쟁''으로 문단 데뷔 후 `은마는 오지 않는다'' `헐리우드 키드이 생애'' 등 작품 발표, 미국·일본·독일 등에서 번역 출간
`헐리우드 키드의 20세기 영화'' 7권 완간, 앞으로 영화와 관련한 40권의 저서 구상중

**고난의 세월 코믹하게 ''변신''**

  1962년도 굳세어라 금순아 포스터 
 

2002년도 굳세어라 금순아 포스터


1962년에 당시의 평균치 제작비였던 400만원의 돈을 들여 최학곤이 극본을 쓰고 감독한 영화 `굳세어라 금순아''는 1.4후퇴 당시에 흥남부두에서 이산가족이 된 남매가 따로따로 남한으로 내려와 거친 세파를 해치며, 전후 세대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고달프게, 하지만 씩씩하게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두 남매는 영화 내내 서로 애달프게 찾아다니지만, 아슬아슬하게 길이 엇갈리기만 할 뿐, 좀처럼 만나지를 못한다. 그러다가 참으로 굳세게 살아가며 버티던 금순이는 병들어 자리에 눕고, 친구를 통해서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은 오빠가 달려갔으나, 끝내 여동생은 오빠의 품안에서 슬프게, 그리고 길게 마지막 흐느끼는 말을 남기며, 오빠만큼은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숨을 거두고, 오빠는 동생더러 죽지 말라면서 “금순아!” 소리치고 ‘몸부림’치며 펑펑 울어 댄다.
그리고는 40년이 지난 다음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영화가 다시 나왔다. 하지만 “다시” 라는 말은 이런 경우 사용하기가 어렵겠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흥남부두에서 오빠를 잃어버린 금순이가 지금까지 굳세게 살아있다면 이미 칠순의 나이에 접어들었겠다. 그리고 요즈음 영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굳센 금순이 세대에 속하는) 어느 칠순 노인이 극장에 걸린 21세기 판 `굳세어라 금순아''의 간판을 보고, 고달프고 슬프고도 추웠던 전쟁 시점이 생각나서, “바람찬 홍남부두”라는 노래 가사를 KBS `가요무대''에서 들은지 얼마 안되어 어떤지 가슴이 뭉클하여, 언젠가 “메리구릭마스(Merry Christmas)”를 드높이 소리치며 웃겼던 희극배우 구봉서 선생이 양념으로 조연을 맡아 더욱 마음을 절절하게 만들었던 옛날의 금순(金錞)이 영화가 생각나서, 꼬깃꼬깃 쌈지돈을 꺼내 표를 사서 극장으로 들어갔다고 상상해보자.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집안 살림은 빨래더미 속에 팽개치고 방바닥에 널펀하게 자빠져 잠만 자려는 현대판 금순이의 모습을 보면 할아버지 관객은, “도대체 저런 한심한 여편네가 세상에 어디 있나” 쯧쯧거리며 혀를 차게 된다. 그리고는 ‘부창부수(夫唱婦隨)’ 라더니 요즘 세상에서는 ‘부창부수(婦唱夫隨)’인 모양이어서, 서방이라는 놈도 또한 계집 못지않게 한심하여, 가족의 삶은커녕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면서, 둘이 엎치락뒤치락 놀아나는 꼬락서니를 보면, 세상은 말세가 지났어도 한참 지난 모양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도대체 요샛것들은 주변에 본받을만한 인물이 그렇게도 없는지 하필이면 저렇게 한심하고 막 가는 인간 말종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돈들이고 시간 들여 영화를 만들고, 그리고 이런 망나니 영화를 왜 돈까지 내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앉아 열심히 구경하는지 머리가 무거워진다. 그런데 조금만 더 버티고 앉아 영화를 계속해서 보던 노인 관객의 입에서는 “어렵쇼”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어렵쇼’란, 영어는 정신없이 부지런히 배우면서도 우리말은 잘 모른다고 자랑하는 요즈음 젊은층에서는 별로 안 쓰는 말이어서 21세기 금순이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모르겠지만,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았네”라는 뜻으로서, 정신적인 시체처럼 살아가던 말종 부부는 금순이가 아기를 들쳐 업고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엄청난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며, 떠들썩 치고받고 집어던지면서 상점과 뒷골목에서 난장판을 벌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논리성 따위는 따져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으면서 황당한 설정을 따라 찧고 까불어대며 웃기기와 조폭을 버무리는 원초적 공식에 충실한 현대 금순이의 모습이 관객을 끌어 모은다.

21세기 초에 많은 관객을 끌어 모았던 사극 `황산벌'' 또한 대단히 “거시기”한 영화이다.
사극이란 본디, 모든 영화 분야 가운데 목에다 힘을 가장 많이 주고, 초등학생들로부터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좌우명을 읊어가며 군신(軍神)이나, 인신(人神)으로 섬기는 주인공을 내세워, “반복되는 역사”로부터 “과거에서 미래를 배운다”는 토인비(Arnold Toynbee, 1916-1981)적 교훈을 깨우치는 개봉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던 대표적인 분야였다.
하지만 `황산벌''에서는 그런 20세기적 사극의 철옹성이 무참하게 무너진다.
우리는 임권택의 출세작 `장군의 아들''을 분기점으로 해서 한국 영화에 나타나는 영웅상의 변천을 지켜보았으며, 폭력의 영웅화는 이른바 조폭 영화의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영웅이라는 개념이 군신으로부터 `조폭 마누라''로 이어지는 샛길을 빠져나가는 사이에, 이제는 국운을 어깨에 짊어졌던 명장들까지도 `웃기는 조폭''의 모습을 슬그머니 닮아가는 듯한 인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거시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황산벌''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거시기 어법(語法)''을 잠깐 살펴보자면, `거시기''라는 말 자체가 거시기한 거시기는 모조리 거시기하다는 거시기여서, 서당(書堂) 천자문 교육 식으로 꼼꼼히 따지던 옛날과는 달리, 엄청난 정보와 자료를 대충 기계로 범세계 정보통신망(Internet)을 거쳐 검색해가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새롭고도 동시에 고루한 한 가지 양상이라고도 하겠는데, 어쨌든 전자놀이(Computer Game)에 길든 관객을 웃기기 위해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과 김유신 장군을 망가뜨려가면서 역사성을 가지고 거시기하게 장난치는 화법을 보면 보수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흥남부두 금순이 세대는'' 아무래도 마음이 거시기할 수밖에 없겠다.
그렇다면 건더기가 없어서 경박한 세대의 영화관(映畵觀)은 어떠한가?

두 편의 금순이 영화를 비교해 보았으니, `황산벌''의 시대적인 무대가 되었던 백제-신라 전쟁을 다룬 작품들 가운데, 원조 `굳세어라 금순아''가 선을 보였던 시절, 그러니깐 한국 사극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에 간판을 내걸었던 영화를 살펴보자.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려 했던 충신 계백 장군 애기가 부분적이지만 비상한 삽화로 들어갔던 `낙화암과 삼천궁녀'', 화랑정신으로 장열하게 전사하는 김유신 장군의 아들애기를 담은 `원술랑'', 잡혀간 부모의 원수를 갚으러 백제성으로 숨어들었다가 적국의 공주와 사랑에 빠지는 화랑 어진랑의 이야기 `화랑도'', 사랑하던 기생을 버리고 삼국통일을 하기 위해 말의 목을 벤 김유신 장군의 젊은시절 이야기 `천관녀''- 만일 이 작품들을 회고전 형식으로 요즈음 활동이 왕성한 영화인들에게 줄줄이 보여준다면, 아마도 그들은 이런 평을 하리라.
“정말 촌스럽네요. 그런 식으로 조잡하게 영화를 만들었으니 외화에 관객을 모두 빼앗겼겠죠.”
이렇게 ‘옛날’ 영화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그때는(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 이해해 달라”는 변명은 통하지가 않는다, ‘지금’도 10년이 지나면 ‘그때’가 될테니 말이다
모든 시대는 주어진 여건이 따로 있고, 그래서 저마다의 시대에 태어난 모든 영화는 그렇게 주어진 ‘지금’을 반영하고, 이렇게 저마다 다른 시대를 충실히 반영하는 영화를 놓고, “옛날 영화는 촌스럽다”거나 “요즈음 영화는 경박하다”고 비판하는 행위란 어쩌면 무의미한 짓일지도 모른다.
[광주용봉RC 블로그]본문 부분발췌

그리고 2005년, MBC TV의 또 다른 '굳세어라 금순아'가 일일연속극으로서 인기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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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34년 부산 영도다리 개통

[동아일보 2004-11-22 21:31]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를 떠나온 사내가 ‘금순이’를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곳은? 바로 부산의 명물인 영도다리다.

1930년대 일제는 영도에 조선소를 지어 군수기지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부산과의 물류를 원활히 하기 위한 교량이 필요했다.

그러나 부산항을 드나들던 해운업자들은 배가 다리에 걸려 우회해야 한다며 항의했고, 결국 다리를 들어올려 배를 통과시키는 도개교(跳開橋)를 짓게 됐다. 설계는 당시 일본에서 ‘천재 건축가’ 소리를 듣던 마스다 준이 맡았다.

1934년 11월 23일 개통식. 부산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6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다리 상판이 올라가는 광경을 지켜봤다. 공식 명칭은 ‘부산대교’(1980년 새로운 부산대교가 생기면서 ‘영도대교’로 바뀌었다)였지만 사람들은 ‘영도다리’라고 불렀다.

이후 영도다리는 유명세 탓에 실향민의 한 맺힌 공간으로 변모한다.

1951년 1·4후퇴 때 이북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으로 향했다. 이들이 알 만한 한강 이남의 ‘랜드마크’는 오로지 영도다리.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기약한 이들은 빈털터리로 다리 주변에 모여들었다.

곳곳에 사람을 찾는 벽보가 붙었다. 날이 밝으면 기다림에 지쳐 투신한 사람들의 보따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경찰은 ‘잠깐만 다시 생각을’ ‘생명은 하나뿐’ 등의 자살 방지 팻말을 내걸었다.

다리 밑 판자촌에는 피란민들의 고민을 들어주던 점(占)집도 80여개에 달했다. 한국 최초의 ‘역술인 거리’였던 셈이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고 장기려 박사가 처음 천막병원을 연 곳도 여기다.

영도다리는 1966년 영도로 향하는 상수도관이 부착되면서 상판 들어 올리기를 멈췄다. 또 2년 전부터는 교량 노후에 따른 철거 계획이 추진돼 부산 시민의 안타까움을 낳았다.

하지만 최근 부산시는 철거 대신 다리를 확대 보존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소식이다. 이르면 2006년 말 다시 상판을 치켜드는 영도다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 개통식 날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 앞에서 때늦은 만남이라도 생기지 않을지 기대해본다.

김준석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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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국제시장 60년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입력 : 2004.10.04 18:59 22' / 수정 : 2004.10.04 23:49 43'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시작하는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는 6·25가 낳은 대표적 피란 가요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는 대목에는 고향을 등지고 생의 마지막 전선까지 쫓겨 온 이의 절규가 있다. 그렇게 ‘나홀로’ 부산까지 온 사람들이 마지막 기댄 곳이 국제시장이었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드라….’

국제시장의 본래 이름은 ‘도떼기 시장’이었다. 일제 때 니시마치(西町)라 불린 일본인 거주지역이 연합군 공습으로 파괴돼 공터로 방치해 있다가, 일본과 만주에서 돌아온 동포들이 호구지책으로 노점상을 벌인 게 시장으로 발전했다. ‘도떼기 시장’은 ‘비정상적인 곳에서 상품 중고품 고물 따위의 도산매·투매·비밀거래로 벅적거리는 시장’을 이른다. 국제시장은 태생부터 뭔가 정신없고 바쁘고 왁자했던 것이다.

국제시장이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을 거쳐 서울 남대문·동대문시장, 대구 서문시장과 함께 국내 최대 시장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도 6·25 전란 와중이었다. 배고픈 피란민들이 물밀 듯 몰려들고 부산항으로 들어온 전쟁 구호품, 군수물자가 정신없이 팔려나갔다. 이 시기 국제시장 상인치고 떼부자가 못되면 바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한일합섬 창업주 김한수씨, 동서·고려해운 양재원씨, 동양그룹 이양구씨 등이 국제시장 출신이었다.

불 난 곳에 재운(財運)이 따른다는 말도 있지만, 이상스럽게 국제시장에선 대형 화재가 끊이지 않았다. 1953년 화재는 4200동 6800가구를 재로 날려버리고 피해액이 510억원이라고 할 만큼 어마어마했다. 이 때문에 불 때는 가마솥을 연상시키는 부산의 ‘가마 부(釜)’자를 ‘부자 부(富)’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까지 생겨났다.

1500개 점포가 ‘영도다리 빼곤 다 판다’는 만물상(商), 국제시장이 60주년을 맞아 오늘부터 닷새 동안 대대적 축제를 벌인다. 백화점과 할인점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것이 시장통의 진한 사람냄새다. 더욱이 국제시장은 민족 수난기(期)의 굴욕과 궁핍을 음화(陰畵)로 간직하고 있다. 전란통 문인, 지식인들도 잔 소주로 몸을 덥히고, 때로 도색잡지나 라이터, 양담배를 팔아 가족을 연명시키던 국제시장이다. 7일 인근에서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에 몰려들 젊은이들이 그 처절하던 생존사(史)를 알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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