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역사속으로 143

3日天下의 主役/ 金玉均의 죽음

3日天下의 主役/ 金玉均의 죽음 김옥균은 실패한 이상주의자 사람이 일생을 사는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을 받아 평생 가슴에 새기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도 젊었을 적에 만났던 그런 분이 있었다. 연세대 신학대학장을 지내신 지동식 (池東植) 박사님이다. 어느 해 그분께서 노환으로 임종이 가까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서둘러 경기 고양 화전(花田)의 댁으로 그 분을 찾아뵈었다. 병석의 그 분(목사님)은 나에게 교회 잘 다니라고 유언하실 줄 알았더니 그런 말씀은 입밖에도 꺼내지 않으시고, “인간은 그릇에 넘치게 물을담을 수 없다. 그러니 너는 훗날 그릇이 작아 물이 넘치는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젊은 날에 그릇을 크게 하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씀이 내게는 유언이 되..

3日天下/ 갑신정변(1)

3日天下/ 갑신정변(1) 김옥균 "오늘밤, 민영익을 못죽이면 내가 죽는다" 1. 우정총국 파티장- 갑신정변 첫날 1884년 12월 4일. 음력 시월 열이레의 둥근 달이 서울 전동(典洞)의 우정총국을 비추고 있다. 이 밤, 느닷없이 치솟는 불길이 역사의 한 순간을 그을린다.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우정총국은 이날 밤 초대 총판(總辦·대표) 홍영식이 주최하는 낙성식 축하파티로 흥청거렸다. 서울에 주재하는 외교관들과 정부 대신들이 각기 다른 꿈의 축배를 올리고 있다. 1876년 일본과 첫 수교를 맺은 이후 조선의 문에는 더 이상 닫아 걸 수 있는 빗장이 없었다. 1882년 미국과 영국·독일에 잇달아 문을 열었고 1884년에는 이탈리아·러시아와 국교를 튼 그때의 조선은 지난달 칠레와 사상 첫 자유무역협정(FTA..

3日天下/ 갑신정변(2)

3日天下/ 갑신정변(2) 갑신정변 3일간에도 합종연횡 거듭 閔씨 일파 권력유지위해 친청노선 택해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조선의 개화가 본격화된 1880년대 조정을 움직이고 있던 유력 정파는 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 민씨(閔氏) 일파, 대원군(大院君) 일파 등 4개였다.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개화파’는 개화의 방법론과 모델을 놓고 다시 두 파로 나뉘었다. ‘온건개화파’는 서양의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고 정신문화는 거부하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내세웠으며, 중국 청(淸)나라가 서양의 근대기술을 도입하여 자강(自强)을 도모하려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모델로 했다.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김윤식(金允植) 이조연(李祖淵)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이들은 40대를 전후한 나이..

裡里驛 1977년 11월 11일

裡里驛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파현장] 1977년 11월 11일 밤 9시15분쯤의 전북 이리(현 익산). 시민들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 대 이란 경기를 TV로 지켜보고 있었고, 시내 삼남극장에서는 700여명의 방청객이 몰려든 가운데 ‘하춘화쇼’가 시작되고 있었다. 진행자 이주일이 막 오프닝멘트를 마친 순간, 갑자기 “꽝!” 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대형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불기둥이 이리역에서 솟아올랐다. 다량의 폭약을 싣고 인천을 떠나 광주로 향하던 화물열차가 이리역에서 대기 중 호송원이 켜놓은 촛불이 원인이 돼 폭발한 것이다. 폭발 지점에는 지름이 30m나 되는 5층 높이의 웅덩이가 패였고 반경 500m 안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이리역에서 100m 떨어진 삼남극장도 지붕이 날아가고 1..

裵貞子

裵貞子 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을 계기로 최근 우리사회에 친일파 논쟁이 뜨겁습니다. 는 친일문제연구가인 정운현 편집국장이 지난 98년부터 1년여 (현 서울신문)에서 연재한 후 단행본으로 묶어펴낸 (개마고원 출간)의 내용을 '미리보는 친일인명사전' 형식으로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1920년대 만주에서 밀정으로 활동할 당시의 배정자. 50대 나이 치고는 젊고 세련된 모습이다. 1949년 2월초 반민특위 강명규(姜明珪) 조사관 일행이 성북동 언덕길을 급히 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한 양옥집 앞에 다다른 강 조사관 일행은 백발의 한 노파를 끌어내 수갑을 채우고는 그 길로 남대문로 반민특위 사무실로 연행하였다. 당시 그 노파의 나이 79세. 겉으로 보기엔 여느 노인네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

을사조약과 국권의 유린

을사조약과 국권의 유린 을사조약과 국권의 유린 노일전쟁(露日戰爭)은 1905년 1월에 여순(旅順)이 함락되고, 3월에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 일본의 승리, 그리고 5월에 남해 앞바다에서 발틱함대를 물리치고 일본이 승리하자 미국 루즈벨트대통령의 알선으로 노 일 양국은 9월에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미국의 극동정책은 처음부터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승인하는 대가로, 중국에 있어서는 러시아 세력의 남하(南下)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미국이 중국에 진출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노 일 양국의 조정역할을 스스로 자원했던 것이다. 1905년 9월에 조인된 노일강화조약(露日講和條約) 제2조에 「러시아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 있어서 정치 군사 경제의 우월한 권리를 승인하고 앞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