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Rok marines 93

베트남판 흥남철수’ 십자성작전의 영웅들

베트남판 흥남철수’ 십자성작전의 영웅들 역사추적 베트남판 흥남철수’ 십자성작전의 영웅들 버림받은 역사, 버림받은 사람들 “흥남철수는 기념! 베트남은 외면?” | 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18-08-29 17:00:01 2018년 09월 호 베트남판 흥남철수’ 십자성작전의 영웅들 ● 월남 패망 교민 354명 구출… 최초·최대 교민 보호 작전 ● 외교 갈등 우려 ‘군사기밀’ 분류…軍史에서도 묻혀 ● 1973년 3월 23일까지만 파병 인정… 유공자 지정 못 받아 ● 국회 ‘참전 인정’ 법률개정안 발의는 했지만… 베트남판 흥남철수’ 십자성작전의 영웅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장진호전투 기념비였다. 이에 앞서 흥남철수..

[만물상]서울 수복 태극기와 박정모

[만물상]서울 수복 태극기와 박정모 2018년 9월의 6.25전쟁영웅 박정모 해병대 대령해병의 용사! 서울 수복, 그 감격의 순간 태극기를 휘날리다 News Desk 승인 2018.08.31 19:19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박정모’ 해병대 대령을 9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박정모 대령은 1927년 3월 20일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나 1946년 해군 1기로 입대하였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해병대 소대장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용전분투하였다. 이어 1950년 9월 27일, 서울탈환 작전 시 해병 제2대대 제6중대 1소대장으로서 소대원들과 함께 새벽에 공격을 시도하였다. 치열한 교전 끝에 중앙청 안으로 들어가 중앙청 옥상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걷어내고 태극기를 가장 먼저..

하숙생

하숙생 하숙집에 새로 들어온 청년은 아코디언 연주자다. 3년전 화상을 입고 성형수술을 했으며 이름을 인석에서 민구로 바꿨다는 그는 수시로 아코디언으로 같은 멜로디를 연주한다. 옆집 부자 노인의 두 번째 아내인 황재숙은 아코디언 소리를 듣고 기겁한다. 그것은 3년전 자신이 버리고 떠난 약혼자 인석이 연주하던 아코디언 멜로디였기 때문. 재숙은 인석을 만나 잘못을 빌지만 인석은 자신을 버린 재숙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는 재숙의 곁을 배회하며 재숙을 정신적으로 죽이려 든다. 은 집착이 부른 복수극의 쓸쓸한 종말을 보여준다. 시종 흐르는 최희준의 히트곡‘ 하숙생’이 차가운 영화의 온도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남동철_2014년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문 대통령의 월남전 관련 사과를 규탄한다

문 대통령의 월남전 관련 사과를 규탄한다! 문 대통령의 월남전 관련 사과를 규탄한다! 월남전은 휴전협정을 위반한 월맹의 불법남침으로 시작되었고 파병된 한국군은 이런 전쟁범죄로 5000명이 죽었다. 양민 학살은 주장일 뿐 한국의 공식적 조사로 확인된 바 없다. 더구나 김대중 대통령이 비슷한 사과를 한 적이 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왜 또 사과를 하나? 趙甲濟 베트남을 국빈 방문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한국과 베트남이 모범적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가고 있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남아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베트남 주석궁에서 가진 쩐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모두 발언에서 이같이 밝히며 “양국이 미래지향적인 협력 증진을 위해..

구수정

구수정 구수정 최근 수정 시각: 2022-04-05 09:33:03 분류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구수정 1. 개요 2. 평가 3. 군사적 지식 부족 및 좌익사관 4. 참조 1. 개요[편집] 한국의 사회운동가. 1988년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후, 1996년부터 베트남 호치민대 역사학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었으나 1999년에 학업을 중단하였다고 이진순과의 대화에서 말했으나, 여러 인터뷰 등에서 마치 자신이 베트남 대학을 졸업한 것처럼 행세하며 호도한 사례로 또한 수많은 거짓말을 해오다가 발각된 구수정에 대해, 중퇴했다는 이마저도 대부분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입학과정이나 수업.학업 절차 등이 자신이 말이 전혀 비상식적이어서, 학적 등 수사가 필요한 부분이라 입을 모으고 있다. 구수정은 2011년 아..

[만물상]해병대 팔각모

[만물상]해병대 팔각모 1993년 국방부 출입 기자단 일원으로 권영해 당시 국방장관과 함께 백령도 해병대 부대를 간 적이 있다. 백령도가 중요한 곳이기는 했지만 국방장관이 직접 찾은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권 장관은 백령도 해병대 간부들의 관사를 둘러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20㎡(8~9평) 될까 말까 한 크기에 지은 지 30년이 다 돼 물이 새거나 난방이 제대로 안 되는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간부 숙소는 권 장관이 다녀간 뒤에야 달라졌다. ▶'귀신 잡는 해병'이란 신화에도 해병대는 군내에서 가장 '춥고 배고픈' 군대로 꼽혀왔다. 예산 배정이나 각종 사업 우선순위에서 해군 내에서조차 발언권이 약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런 해병대를 강군(强軍), 젊은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군대로 지탱해온 것이 독특..

해병 월남전에 가다 (제1진 참전수기)

해병 월남전에 가다 (제1진 참전수기) 제2대대 6중대 1소대장 최우식(해간 33기) 1. 출발에 앞서 월남 파병부대로 포항 제1사단 제2연대가 결정된 후 1965년 8월에 접어들면서 월남전을 대비한 훈련은 연일 계속 되었다. 전투의 가장 기본 훈련인 각개 전투가 4시간, 그리고 나머지 4시간은 월남의 기후, 풍토, 지리 그리고 게릴라 전법에 관한 것이었다. 소대장들은 각자 교안을 짜랴, 훈련을 시키랴, 보충병들을 받아드리랴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한여름의 더위도 잊은 듯 했다. 8월 하고도 중순에 접어들자 날씨는 폭염 그대로 찌는 한낮의 더위가 병사들의 군복을 땀으로 흠뻑 젖게 했다. 월남에 가면 땀께나 흘린다는데 땀 흘리는 훈련도 겸하는 듯싶을 정도로 날씨는 무더웠다. 그러나 파월준비 병사들에게..

濟州道와 女軍

濟州道와 女軍 조선시대 제주에 女軍이 있었다 김상헌 남사록에 성안에서 보초서던 여정(女丁) 기록 데스크승인 2016.01.25 좌동철 기자 | roots@jejunews.com 조선시대에 제주어로 ‘예청’이라 불리던 여자병사인 여정(女丁)이 있었다. 1601년 제주에서 발생한 모반사건으로 처벌될까 두려워하던 제주도민을 달래기 위해 안무어사(安撫御使·지방에 파견된 특사)로 온 조선 중기 문신 김상헌(1570~1652)이 쓴 기행문인 남사록(南?錄)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김상헌은 “내가 알아보니 제주의 성안에 남성(男丁)은 500명이고, 여정(女丁)은 800명이다. 남성이 적어서 만약 사변이 발생해 성을 지키게 되면 민가에서 건강한 부녀자를 골라 성 위에 세웠다”고 했다. 힘이 센 여자들을 선발, 남자들..

6·25 장진호전투 기념비, 美해병대 박물관에 선다

6·25 장진호전투 기념비, 美해병대 박물관에 선다 6·25 장진호전투 기념비, 美해병대 박물관에 선다 정성택기자 입력 2015-07-24 03:00:00 수정 2015-07-24 03:00:00 중공군 포위 뚫고 ‘흥남철수’ 이끌어 미국 버지니아 주 콴티코시의 해병대 국립박물관에 세워질 장진호전투 기념비 디자인. 국가보훈처 제공 6·25전쟁 당시 ‘기적의 흥남철수’로 유명한 장진호전투 기념비가 미국에 세워진다. 23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미 버지니아 주 콴티코 시에 있는 해병대 국립박물관에서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62주년인 27일 장진호전투 기념비 기공식이 열린다. 기념비는 약 2m 높이의 8각 모양으로 맨 위에는 장진호전투가 벌어졌던 함경남도 장진군 고토리 지역을 기념해 ‘고토리의 별’ 장식이 ..

못생긴 해병 의장대 사열, 장개석 총통을 맞이하다

못생긴 해병 의장대 사열, 장개석 총통을 맞이하다 장개석 총통 진해 방문 [1] 공정식 前 해병대사령관/바다의 사나이·영원한 해병 이승만-장제스 회담 초창기 해군은 외교 업무까지 담당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 나라 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시절이어서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한 경우 해군을 정상회담 경호·경비와 영접에 해군을 동원했던 것이다. 특별한 경우란 바로 장제스(蔣介石) 자유중국(타이완) 총통과 이대통령의 진해회담이었다. 자유중국 국부였던 장 총통은 1949년 당시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 국민당 총재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총통이라 불렀고, 이대통령도 그렇게 예우하기를 원했다. 초창기 해군 외교 업무까지 담당 장 총통 자신이 국빈대우를 꺼려 서울을 사양해 회담장..